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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차파 한인촌과 도산의 삶] 안중근 의거 후 망명객들 파차파로 이주

단독범 주장에 지도자들 풀려나 한국 탈출 학생들 리버사이드로 한일합방 규탄 '망국일' 행사 가져 1918년부터 여성들도 회원 자격 독립 운동의 메카로 파차파 캠프는 초기 미주 한인 사회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물론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설립되었으나 이 두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회원 중 상당수는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이었다. 또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가장 먼저 생긴 곳 역시 바로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이다.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파차파 캠프 현지에서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신한민보' 1909년초 보도에 의하면, 당시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는 샌프란시스코, 레드랜즈, 리버사이드 등에 설립되었는데 지방회 보고가 가장 활발한 곳이 바로 리버사이드이다. '신한민보' 1909년 4월 7일 보도에 "리버사이드 지방회장 차정석씨의 보고를 근거하니 본월 삼일 통상회의 결안은 왼쪽과 같다. 신입회원은 백신구씨, 평의원은 5명을 상치하기로 의정 후 김인수.이치환.백신구.김기만.김윤각씨가 선발되었다고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신한민보 1909년 4월 14일 보도에 "본월 십삼일에 리버사이드 지방회장 차정석씨의 보고를 근거하니 본월 십일 특별회의 신임 임원은 왼쪽과 같다. 회장 차정석, 부회장 백신구, 총무 이응호, 서기 백신구, 재무 김기만, 학무 이응호, 법무 김인수, 구제 김윤각, 대의원 이치완.이응호라 한다"고 했다. 기사에 실린 인물들은 리버사이드 거주 한인들이고 이들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곳이 바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이다. 1909년 5월에는 토론회도 조직하여 활발한 지식 교류 활동도 전개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암살했다는 소식을 파차파 캠프 한인들이 듣게 되었고 파차파 캠프는 또 다시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엘렌 전은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파차파 캠프는 다시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인 장로 선교회 건물에서 거의 매일 밤마다 회의가 열렸고 안중근 의사를 돕기 위한 기금 모금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전낙청도 마차를 살 수 있는 금액을 내겠다고 약속했는데 부인이 너무 많다고 불평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당시 대부분의 부인들은 남편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불평은 했지만 남편들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의 행동에 대해 한인 그 누구도 은혜를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거의 매일 밤 모임에서 연설과 기금 모금 행사가 열렸다."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 사건 소식을 듣고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며 파차파 캠프가 그 당시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에서 혼자서 한 행동이라고 주장했고 체포된 한인 지도자들은 풀려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리버사이드로 망명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 학생들이었는데 기회가 생겨 한국을 탈출해서 리버사이드까지 온 것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을 듣고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더욱 고무되어 독립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10년 나라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접한 파차파 캠프 한인들은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망국일' 행사를 거행했다. "집회가 시작되면서 참석자들은 자리에 앉았다. 여성들은 자리를 떠났고 애국가로 행사는 시작되었다. 미스터 송은 애국가를 힘차게 부르면서 참석자들도 함께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참석자들의 얼굴에는 체념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만세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참석자 모두 '만세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지면서 울음바다가 되었다. 눈물 때문에 기도는 우리 아버지를 시작으로 했으나 미처 다 끝내지도 못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다음은 양반 출신인 임씨의 차례였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만약 안 선생이 여기 있다면 기죽지 말고 머리를 들고 독립운동을 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곧 돌아올 것이고 안 도산 선생도 곧 올 것입니다. 해외에 살고 있는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전낙청의 딸 엘렌 전은 안창호가 1911년에 리버사이드에 돌아온 후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를 돌보고 기차를 타고 LA에 도착했다. 이혜련 여사와 필립이 LA로 마중을 나갔다. 이혜련 여사는 남편에게 "내가 바느질과 빨래를 해서 300불을 벌었어요"라고 남편 안창호에게 자랑했다. 안창호는 "이건 정말 기적이오. 독립운동의 동지인 이갑이 병을 얻어 함께 미국에 왔는데 다행히 병은 치료했으나 병상에 누워 있는 신세가 되었고 돈도 없는 상황이오. 대한인국민회 기금도 거의 고갈 상태인데 내가 이 돈 300불을 이갑에게 보내도 되겠소? 이 돈은 그가 더욱 필요로 하오. 나도 이제 노동을 해서 돈을 벌 예정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혜련 여사는 이갑에게 돈을 보내는 것에 동의를 했다. 이것은 안창호의 동지애를 잘 알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여성 회원들의 참여와 활동 리버사이드 지방회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여성들이 대한인국민회 정식 회원으로 등록하면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는 1918년에 "대한인국민회 헌장 제 1조의 동 1, 2관에 기인하여 북미 총회 관하 미주, 멕시코 각 지방의 여성 동포로서 연령 18세 이상인 자는 모두 입회를 허락하여 권리를 같이 누리고 의무를 같이 행할 것"을 지령했다. 특히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은 타 지역과는 달리 여성과 자녀들이 함께 거주하는 가족 중심 공동체였기 때문에 여성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했다. 파차파 캠프의 한인 여성들은 초기에는 주로 남편들의 대한인국민회 활동과 독립운동 기금 모금에 간접적으로 동의하는 소극적인 활동을 했으나 1918년 이후부터는 여성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행사에 참여하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확인되었다. 1919년 9월 18일 신한민보는 "리버사이드 지방 한인 부인들은 지난 9월 16일 일반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남자들과 같이 하기로 하였다 하니 참 장려할 만하다. 특히 리운경씨의 부인은 60 당년에 병원에서 고되게 일하여 버는 돈을 우리 사회와 국가에 다 쓴다고 하니 참 그 열성은 모범할 만하더라. 또한 그 지방에서는 각각 한인들의 집에서 간장을 만들어 쓰는 고로 일인의 장을 쓰지 않고 일반 일인의 물화를 모두 배척한다더라"라고 보도했다. 이처럼 여성들이 리버사이드 한인타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파차파 캠프에서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도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2017-11-05

“서재필은 일제 밀정, 안중근은 고종 밀명 받고 거사”

올해 1월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을 출간한 황태연(62·사진) 동국대 교수가 지난주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을 잇따라 펴냈다. 지난해엔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민국의 의미』도 냈다. 내년엔 『한국 근대화와 정치사상』(이상 청계출판사)을 펴낼 예정이다. 황 교수는 한때 마르크시즘 철학자였다. 1974년 서울대 외교학과 입학 이후 학생운동을 하며 마르크시즘을 접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에 유학해 마르크스 이론을 분석한 ‘지배와 노동’(91년)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랬던 그가 대한제국에 꽂힌 이유는 뭘까. “박사학위를 받고 나니까 마르크스의 황금기가 더 이상 아닌 점도 작용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실에 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마르크스를 하다 보면 막스 베버를 하게 되고 마르크스와 베버의 동양관과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의 동양관이 ‘동양 전제주의’로 같습니다. 이를 두고 강의 때 독일 교수와 논쟁도 벌였습니다. 동양에서 온 나는 그 테제가 맘에 들지 않았어요. 우리 역사를 봐도 신하들이 왕의 말을 따르기만 했나요? ‘전하,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가 얼마나 빈번했는데…. 서양에서는 좌파나 우파 모두 동양을 보는 시각이 잘못됐다고 느꼈습니다. 학위를 마쳐야 했기에 그 주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 수는 없었죠.” ‘동양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그의 시도는 94년 동국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본격화됐다. 공맹 철학을 중심으로 동양사상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한국의 근대사 관련 자료도 모아 나갔다. 동양과 서양의 고금(古今)을 가로지르며 문명의 형성 과정을 재구성한 연구 결과물이 『공자와 세계』(전 5권·2011), 『감정과 공감의 해석학』(전 2권·2015)이다. 그리고 동양 속에 위치한 한국의 특수성을 찾아내기 위한 작업이 대한제국 관련 저서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Q :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였고 조선시대와의 차이점은 뭔가요. A : “대한제국 연구자에게 공히 인정되는 바는 조선은 전(前)근대 국가이고 대한제국은 근대국가라는 것입니다. 근대국가는 신분이 철폐된 사회이고 대의제가 실시된 사회죠. 서얼제도와 노비상속제는 고종 때 철폐됩니다.” Q : 대한제국에 대의제가 있었나요. A : “중추원이 대의제 기능을 했죠. 이 중추원이 일본 침략으로 더 발전을 못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일제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르는 게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중추원에는 과거 상놈들도 많이 들어갔어요. 황국협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데 다 보부상 출신입니다. 당시 주요 정치세력인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세력이 중추원의 주축이었죠. 50명 중추원 의관 중 독립협회 계열이 17명 정도, 황국협회 계열이 28명이었고, 나머지 5명은 나이가 들어 대우해야 할 인물들이었습니다. 중추원이 고종의 제안으로 설립되지만 고종의 말을 들을 근왕파는 홍종우 등 서너 명뿐이었죠. 서양 말로 하면 ‘왕당파’는 줄인 것입니다.” Q :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A : “독립협회는 처음 독립문 건립추진위원회로 출발하는데 고종의 조직이었습니다. ‘독립협회’란 명칭과 현판 모두 고종과 왕세자가 내려준 겁니다. 건립 자금의 17%는 고종과 세자가 내려준 내탕금이었고, 범국민적 모금운동을 하게 한 것도 고종이었죠.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고종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출발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1898년 7월부터 성격이 변질됩니다. 일본에 망명했던 박영효가 일본에서 자기 세력인 이규완·황철·이정길 등을 한국으로 잠입시켜 왜인 거주 지역에 은거하게 하면서 독립협회를 배후 조종해 반(反)대한제국, 반(反)고종 변란단체로 바꿉니다. 그때부터 반러·친일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중심 의제가 됩니다. 이 정치결사들은 1898년 11월부터 1899년 1월까지는 암살과 폭란을 일삼는 폭력조직으로 변질돼 대한제국에 대한 변란세력으로 전락합니다.” Q : 고종의 리더십 문제는 없나요. A : “폭력으로 대하는 독립협회에 고종은 끝까지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독립협회는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고립당해 자멸합니다. 고종이 독립협회를 탄압한 것이 아닙니다. 황국신문·제국신문·매일신문 등 거의 모든 언론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Q : 독립협회의 일반적 이미지와 다른데요. A : “독립협회를 잘 알지 못하면서 띄우는 이들이 있고, 혹은 친일적 실체를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존에 독립협회를 애국적 단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들의 친일을 증명하는 자료가 나오고 서재필·윤효정 등이 일제 밀정 역할을 한 사료가 나타나도 그런 사료들을 무시하고 감춰 버리기까지 합니다. 사료로 본 독립협회의 모습은 교과서에 나온 모습과 완전히 상반된다고 보면 됩니다.” Q : 역사가 어떻게 그렇게 뒤집어졌나요. A : “해방 후 최초 연구자들이 잘못한 것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갑신정변-갑오경장-독립협회로 이어지는 프레임은 교과서에서 어떻게 설명되나요? 개화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 실패했다고 하죠. 이것이 조선사편수회의 시각입니다. 우리 근대사를 기술하는 기본 프레임이죠. 해방 이후 많은 사가들이 식민사관 극복을 외쳤지만 그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부지불식간에 ‘은근한’ 친일적 기술로 끝났습니다. ‘노골적’ 친일은 최근에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Q : 한국 근대사를 직접 공부하면서 어려운 점이나 충격적 경험이 있다면. A : “말씀드렸듯이 우선 사료로 보는 한국사와 우리가 가르치고 배운 한국사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근대사의 시작을 대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술로 시작하는데 대개 고종이 동학을 탄압한 것으로 알고 있죠. 그런데 실제 사료를 보면 그렇지 않아요. 동학의 1차 봉기는 농민군이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삼남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곧 이어 2차 봉기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고종의 밀명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 밀지가 남아 있어요. 일본군이 그걸 빼앗아 일본공사관 기록에 남겨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료를 무시하고, 또 이 밀지의 누설을 막으라고 당부하는 전봉준의 친필 지시문도 무시해 왔습니다. 또 서재필의 일제 밀정 기록이 일본공사관 공식 기록에 나오는데 그런 것을 무시하고 서재필을 애국지사로 만들어 놨죠. 윤효정도 일제 밀정임을 정교가 『대한계년사』에 정확히 기록해 놨는데 오히려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고종의 밀명을 받고 움직였다는 점도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2017-08-12

안중근 의사의 애국혼

미주에서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된지 올 해로 꼭 30년째다. 윤경학 회장이 안중근 의사의 애국·애족정신을 미주 한인들에게도 심어주겠다며 지난 1987년 LA에서 기념사업회를 설립한 것이 시작이 됐다. 윤경학 회장이 2012년 작고하고 지금은 딸인 윤자성 회장이 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다. 대를 이은 안중근 의사 사랑이다. 매년 안 의사 순국일이면 북가주에서 추모식이 열리는 건 그래도 알려진 일이지만, 윤자성 회장이 매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홀홀단신 행사를 개최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윤 회장의 안중근 사랑은 친조부인 애국지사 의암 윤능효(사진) 선생으로부터 시작됐다. 윤능효 선생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데 의거 자금을 지원했던 애국지사다. 1882년 함흥남도 함흥 출생인 윤능효 선생은 1904년 항일운동을 하다 투옥된뒤 탈옥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독립운동 연락책으로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대동공보 이강 주필과 함께 안중근 의사를 도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일을 도왔다. 당시 의거 자금 2백원(현재가치 약 2억원)을 지원했다. 윤능효 선생의 애국활동은 생전에 알려지지 않았다. 사후 아들인 윤경학 회장의 노력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1990년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이런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는 윤경학 회장은 한국은 물론 미국으로 건너와서도 안중근 의사의 애국혼과 평화사상을 한인들에게 심어주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윤경학 회장은 1987년 LA에서 미주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를 설립했고 매년 안 의사 순국일과 거사일에 맞춰 기념식을 열어왔다. 선뜻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 20년간 사비를 털어가며 행사를 개최했다. 윤경학 회장이 작고하기 4년 전부터는 서니베일에 거주하는 딸 윤자성 회장이 기념사업회를 이어받았다. 윤자성 회장은 기념사업회를 이어받은 뒤에는 매년 추모행사를 여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한국학교도 설립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서만 자라나는 한인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과 가치관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3년 전부터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도 열고 있다. 올해도 안중근 의사의 역사관, 애국정신, 평화사상 등을 주제로 지난 25일 대회가 열렸다. 오는 4일에는 107주년 안중근 의사 순국 추모식도 쿠퍼티노 퀸란 센터(10185 N Stelling Rd, Cupertino)에서 오전 10시 30분에 열린다. 윤자성 회장은 “매년 행사를 준비하며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나라 잃고 이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할아버지와 목숨을 던진 안의사를 생각하면 내가 하는 일은 100분의 1도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으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며 “매년 행사를 개최할 때마다 한 분이라도 더 찾아오면 그만큼 기쁘고 보람있는 순간은 없다”며 안 의사 추모식에 많은 한인들의 참석을 당부했다. 윤자성 회장은 “안중근 의사가 목숨을 바쳐 의거를 했던 것은 지금 분열된 한민족을 원했던 건 아니었을 것”이라며 “어서 빨리 통일이 돼 하나 된 대한민국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소망을 전하기도 했다. 최정현 기자

2017-02-28

안중근 의사의 나라사랑 되새겼다

북가주 한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인으로서 정체성과 자긍심은 물론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세계평화사상을 심어주기 위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열렸다. 미주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회장 윤자성)가 주최로 열린 한국어 말하기 대회는 25일 샌호세 임마누엘 장로교회에서 13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됐다. 윤자성 회장은 대회에 앞서 인사말을 통해 “오늘 대회에 참석한 학생들은 원고를 준비하고 연습하며 안중근 의사에 대해 많이 배웠을 것으로 안다”며 “안 의사가 보여줬던 숭고한 애국정신과 희생정신 그리고 평화사상은 여러분들이 이국땅에 살면서도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잊지 않고 또한 한인 커뮤니티와 대한민국의 발전,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한 희망의 이정표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이날 말하기 대회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삶을 통해 자신이 배우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이찬서(다솜한국학교 4학년) 군이 영예의 대상인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군은 안중근 의사가 강조한 동양의 평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안 의사의 희생정신을 통한 나라사랑의 교훈과 다짐을 나누고 싶다고 밝혀 큰 박수를 받았다. 이외에도 우소라(모퉁이돌한국학교 1학년) 학생이 애국상을, 홍성범(몬트레이한국학교 5학년), 김연준(트라이밸리한국학교 5학년) 학생이 민족상을 각각 수상했다. 장려상에는 조유리, 조유빈, 김예원, 이시유 학생이 선정됐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최철순 SF교육원장은 심사평을 통해 “참가 학생 모두가 안중근 의사의 생애, 역사관 및 애국정신, 평화사상 등을 호소력과 설득력 있게 잘 표현해 말하기 대회라기보다는 역사공부의 장같은 느낌을 받았다”며 “모든 학생들이 표현력은 물론 발표 태도도 자연스럽고 자신감에 넘쳐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평화상, 애국상, 민족상 등 수상자 4명은 오는 3월 4일 쿠퍼니토 퀸란 센터에서 열리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에서 다시 한 번 발표를 하게 된다. 최정현 기자

2017-02-27

안중근 의사 작사·작곡한 옥중가 … 노동은 교수, 국내서 악보 첫 공개

"만주땅 시베리아 넓은 들판에/동에 갔다 서에 번쩍 이내 신세야/교대 잠이 편안하여 누가 자며/콩둔 밥이 맛이 있어 누가 먹겠나/때려라 부셔라 왜놈들 죽여라."(옥중가 3절 가사)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살해한 뒤 뤼순 감옥에 갇혔다가 이듬해 사형당한 안중근 의사가 직접 작사·작곡한 '옥중가(오른쪽 악보)'의 일부다. 노동은(69·사진) 중앙대 명예교수가 13일 옥중가의 악보를 구해 역사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공개했다. 노 교수는 "옥중가는 안 의사의 사촌 여동생인 안익근이 6촌 동생 곽희종에게 가르친 것으로, 중국에서는 이미 채보가 돼 있었다"며 "옥중가 악보 공개는 국내에선 처음"이라고 말했다. 옥중가 외에 민족시인 김여제가 지은 '흥사단 단가', 상하이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에 발표된 '독립군가'의 가사와 악보 등도 공개됐다. 노 교수는 "지난 4년간 중국과 일본 등을 오가며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이 일본의 조선침략에 항거한 내용을 담은 '항일노래' 100여곡을 새로 수집했다"고 말했다. 이중엔 불교계 학교에서 독립 의지를 다지고자 부른 학도가 중 가장 처음 나온 '학도권면가'를 비롯해 부자 작곡가 이두산·정호가 만든 노래도 들어 있다고 한다. 노 교수는 기존에 발표된 250곡에다 새로 찾은 100여곡을 보태 연말에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항일음악 350곡'이란 항일 노래집을 발간할 계획이다. 동학혁명 시기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항일 노래를 연대별로 정리한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우리의 항일 노래들은 1910년 이전에는 미국 찬송가, 1910년대에는 일본 창가와 군가의 영향을 받았고 1920년대부터 독창적인 곡들이 창작됐다"며 "항일노래는 근대 음악사의 중심 축"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최근까지는 이념적인 이유 등으로 신흥무관학교 군가 같은 독립군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 '독립가요'가 주로 소개됐다"며 "이제부터라도 정파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민족 전체의 관점에서 항일 음악을 계승해 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선총독부가 금지가요로 지정하면서 잊혀지거나 사장된 작품들에 대한 연구 필요성을 강조했다. 노 교수는 친일파들이 만든 노래와 일본 군가 등을 엮은 친일가요집 발간도 계획중이라고 소개했다. 한국음악학학회장·중앙대 국악대학장을 지낸 그는 '음악기학' 등 400여 편의 국악 관련 논문과 '한국근대음악사' 등 30권의 저서를 발표했다. 채승기 기자

2015-08-13

[특별기고] 안중근 동양평화론과 동북아

곧 우리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한다. 정부는 지난 3월부터 광복 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민족긍지' '국운융성' '미래희망'을 주요 키워드로 관련 행사들을 준비해 왔다. 일본과 중국도 각각 '전후 70년'과 '승전 70년'을 다른 방식으로 기념하려 하고 있다. 이웃 나라들의 기념방식이 우리에게도 큰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현재까지의 '전후 70년'을 총결산하고 향후 일본의 비전을 제시하는 '아베 담화'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 2월 학자.경제인.관료 출신 16인으로 구성된 '21세기 구상 간담회'를 조직하고 이후 7차례 이상의 회의를 열었다. 간담회는 20세기 전반기의 역사 평가 전후 70년 일본의 성취 21세기 비전 등에 관한 일련의 주제를 논의해 왔다. 아베는 7월 말 이 간담회의 최종 보고서를 참조하면서 자신의 담화를 구상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치외교사 학자이면서 간담회 좌장대리를 맡고 있는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 전 도쿄대 교수는 과거 일본이 일으켰던 만주사변 등이 침략전쟁이었고 조선 등에 대한 식민지 지배도 잘못된 것이었음을 아베 정부가 인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아베가 자신의 외교안보정책 브레인이기도 한 기타오카의 주장을 선선히 수용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베의 8.15 담화에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중지를 반영하려는 일본적 기념방식은 참고할 만하다. 한편 중국은 9월3일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벌이면서 항일전쟁 '승전 70주년'을 기념하려 한다. 러시아가 지난 5월에 그러했듯이 다수 우방 국가들의 지도자 및 군대를 초청해 인민해방군과 함께 행진을 하게 함으로써 국제적 연대도 보여주고 글로벌 강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의 위상도 과시하려 한다. 문제는 아베의 전후 70년 담화와 중국의 승전 70주년 군사 퍼레이드가 한국에 만만치 않은 과제들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베 담화에는 과거 일본 정부가 표명했던 담화들을 계승하겠다는 수준의 입장이 표명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 경우 우리가 기대했던 수준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아베가 취임 초기의 입장을 바꿔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제국주의 일본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나 식민지 지배 및 아시아 침략에 대한 사죄를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점을 나름대로 평가해 줄 필요가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중국이 '승전 70주년' 퍼레이드에 남북한 지도자의 참석을 정식 요청한 것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가 하는 문제도 녹록치 않다. 정부는 여러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항일전쟁 시기에 창설된 광복군이 우리 군의 전통 가운데 하나로 계승되고 있고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가 최근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전향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어떨까 한다. 아베 담화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면 평가해 주고 중국이 요청하는 '승전 70주년 퍼레이드'에도 일정한 형식을 갖춰 참가한다면 올해 하반기에 우리 주도로 한.중.일 정상회담을 개최할 수 있는 여건이 자연스럽게 마련될 것이다. 이 정상회담에서 태평양전쟁 70주년을 맞아 더 이상 동북아 지역 내에 국가 간 갈등과 전쟁이 없는 질서를 함께 창출할 것을 공동선언에 담는다면 어떠할까. 이러한 외교전략의 추진이 100여년 전에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면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원대한 비전에도 부응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2015-08-03

"안중근 의사 유해 뤼순에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뤼순 감옥 동쪽 500m 지점에 매장돼 있다고 확신합니다."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미국을 방문중인 안중근의사숭모회 김영광(사진) 부이사장은 확신에 찬 모습으로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지난 20여년간 중국 일본 러시아를 오가며 현지 답사와 관련자 인터뷰 기록 열람 등을 통해 안 의사 묘지를 찾기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뤼순 지역만 11번이나 답사했다. 경기도 평택 출신인 김 부이사장은 3선 의원을 지냈으며 '일본 지성이 본 안중근'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의 이같은 노력은 언론을 통해 잠깐씩 알려지기도 했으나 안 의사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최근 안 의사 유해 발굴 사업이 화두로 떠올라 새삼 주목 받고 있다. 중국과의 국교수립 이전인 지난 87년에는 중국으로 잠입해 뤼순감옥을 찾아나섰다가 현지 공안에 체포돼 100위안의 벌금과 10일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김 부이사장은 "그동안 노력으로 안 의사 묘지를 직접 참배했다는 사람을 2명 확보했고 고증자료를 제시한 사람이 5명"이라면서 "그곳은 발굴 시도를 안해본 지역으로 안 의사 유해가 확실히 매장돼 있다"고 확신했다. 안 의사 묘지 참배자 두 명의 증언에 따르면 유해 매장지로 추정되는 곳은 북위 38도49분27초 동경 121도16분2초 지역으로 안 의사가 순국한 뤼순 감옥 동쪽 500m 지점. 이 곳에는 '죄인묘역'이라는 석탑이 세워져 있는 주변에서 가장 오래된 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교생이었던 지난 47년 학교에서 '의사 안중근'이라는 연극을 했는데 내가 안 의사 역을 맡았었다"면서 "살신성인을 통해 독립운동을 구현한 애국정신은 후세에 분명히 알려줘야 한다"며 안 의사와의 인연을 설명했다. 김 부이사장은 또 "안 의사는 자신의 유해를 반드시 고국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면서 "그분의 유해를 찾아 고국에 봉안하지 못하면 그것은 7000만 남북 모두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김 부이사장은 "지금까지 안 의사 유해를 찾기 위한 전문적인 노력이 없었다"면서 "개인이 이를 추진하는데는 한계가 있고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할 때"라고 안타까워 했다. 그의 이같은 노력은 이달 초 LA타임스를 통해 자세히 보도되기도 했다. 김 부이사장은 내일(26일) 오후 뉴욕 플러싱 열린공간에서 진행되는 '안 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행사'에 참석 특별 강연한다. 안준용 기자

2010-03-24

“안 의사 유해 뤼순에 있다”…안중근의사숭모회 김영광 부이사장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뤼순 감옥 동쪽 500m 지점에 매장돼 있다고 확신합니다.”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뉴욕을 방문중인 안중근의사숭모회 김영광(사진·79) 부이사장은 확신에 찬 모습으로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지난 20여년간 중국, 일본, 러시아를 오가며 현지 답사와 관련자 인터뷰, 기록 열람 등을 통해 안 의사 묘지를 찾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뤼순 지역만 11번이나 답사했다. 경기도 평택 출신인 김 부이사장은 3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일본 지성이 본 안중근’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노력은 언론을 통해 잠깐씩 알려지기도 했으나, 안 의사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최근 안 의사 유해 발굴 사업이 화두로 떠올라 새삼 주목 받고 있다. 중국과의 국교수립 이전인 지난 87년에는 중국으로 가 뤼순감옥을 찾아나섰다가 현지 공안에 체포돼 100위안의 벌금과 10일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김 부이사장은 “그동안 노력으로 안 의사 묘지를 직접 참배했다는 사람을 2명 확보했고, 고증자료를 제시한 사람이 5명”이라면서 “그 곳은 발굴 시도를 하지 않은 지역으로, 안 의사 유해가 확실히 매장돼 있다”고 확신했다. 안 의사 묘지 참배자 두 명의 증언에 따르면 유해 매장지로 추정되는 곳은 북위 38도49분27초, 동경 121도16분2초 지역으로, 안 의사가 순국한 뤼순 감옥 동쪽 500m 지점. 이 곳에는 ‘죄인묘역’이라는 석탑이 세워져 있는, 주변에서 가장 오래된 묘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교생이었던 지난 47년 학교에서 ‘의사 안중근’이라는 연극을 했는데, 내가 안 의사 역을 맡았었다”면서 “살신성인을 통해 독립운동을 구현한 안 의사의 애국정신은 후세에 분명히 알려줘야 한다”며 안 의사와의 인연을 설명했다. 김 부이사장은 또 “안 의사는 자신의 유해를 반드시 고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면서 “그분의 유해를 찾아 고국에 봉안하지 못하면 그것은 7000만 남북 모두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김 부이사장은 “지금까지 안 의사 유해를 찾기 위한 전문적인 노력이 없었다”면서 “개인이 이를 추진하는데는 한계가 있고,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할 때”라고 안타까워 했다. 그의 이 같은 노력은 LA타임스를 통해 자세히 보도되기도 했다. 신문은 2008년 한국 정부가 직접 뤼순 지역에서 발굴에 나섰을 때도 김 부이사장이 지목한 지역이 아니라, 뤼순 감옥 북쪽 일대를 파헤쳐 쓰레기만 나왔다고 전했다. 김 부이사장은 오는 26일 오후 플러싱 열린공간에서 진행되는 ‘안 의사 순국 100주년 추모행사’에 참석, 특별강연한다. 25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안 의사 친필 휘호 전시회가 시작된다. 안준용 기자 jyahn@koreadaily.com

2010-03-24

“안중근 의사는 한인 롤모델"…타운서 26일 순국 100주기 추모행사

"미주 한인들에게 안중근 의사 의거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안의사는 의거의 주인공임은 물론 만국평화 철학의 주창자이기도 합니다. 2세는 물론 미국인들도 안의사를 제대로 알게 되면 세계 평화에 기여할 비전을 갖게 됩니다."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0주기가 되는 뜻깊은 날이다. 1909년 10월26일 일본 제국주의의 핵심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처단했고 당당하게 일본군들에게 동양 평화론을 주창하고 일제에 의해서 사형당한 그날이다. 이날을 맞아 미주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회장 윤경학 목사) 준비위원회(회장 황선철)는 순국일에 안의사의 뜻을 기리는 행사를 26일 오전10시 가든스위트호텔에서 갖는다. "안의사를 오사마 빈 라덴으로 착각하는 젊은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안의사는 테러리스트가 아닌 처단자였습니다. 죄없는 다수를 상대로 한 테러와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이렇게 2세들이 안중근 의사를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사실은 1세들의 책임이지만 1세들조차 잘 모르기에 일어나는 실수라고 한다. 안의사는 히로부미에게 잘못된 행동에 대한 촉구와 발언 번복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는 것. 황 위원장은 "안의사의 의거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건졌다"며 "끝까지 만국 평화를 위한 그의 철학 의연했던 애국자적 모습 등 한인 2세들의 롤모델로 안중근 의사만한 사람이 없다"고 강조했다. 기념사업회는 향후 미주에서 안의사의 삶과 철학을 재조명하는 것은 물론 비저니스트로의 모습 리더로서의 모습을 잘 발굴하여 리더스쿨로서의 역할을 도모할 계획이다. 한편 이날 행사가 오전10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10시가 바로 안의사의 순국시간 때문이라며 참석자들의 이른 행차를 부탁했다. 행사후에는 점심식사가 제공된다. ▷문의: (213)249-0703 장병희 기자 chang@koreadaily.com

201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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